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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검도회] [한겨레]검도인 장승학씨의 뒤늦은 깨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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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울특별시검도회 작성일05-01-03 조회2,19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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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새해특집 행복의 조건- 생각을 바꾸자 느림속의 행복 그땐 왜 몰랐을까 나지막한 야산아랫 마을의 단층집 거실엔 요즘 흔치 않은 연탄 난로가 놓여 있었다. 따사로운 온기가 느껴진다.

난로 옆에선 장승학(56)씨와 부인 이영희(53)씨, 그리고 이들의 두 살배기 외손자 서우가 연탄 같은 소박한 웃음을 나누고 있었다.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에 사는 장씨는 검도인이다.

집에서 차로 5분 거리에 있는 도장인 장승학클럽의 사범으로 검도 공인 6단이다. 그가 도장에서 서서히 검을 빼든다.

속전속결의 마니아가 되어버린 현대인들에게 그의 동작은 너무 느려 보인다.

그러나 검도에서 조급은 자멸의 지름길. 느리게 느리게 곡선을 그리며 도는 검끝의 기운이 점차 널찍한 도장을 가득 채운다.

불과 10여년 전만 해도 그가 이런 마음의 자세를 가진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단기 승부에 인생을 거는 광고인이었다. 해태 부라보콘, 한마음껌, 바밤바, 맛동산, 알사탕, 에이스 비스킷, 해태 사이다 등 귀에 익은 광고를 만든 주역이었다. 그는 공무원인 아버지와 학교 선생님들의 말을 잘 듣고 공부와 운동에 열심인 모범생이었다.

중학교 1학년 때 시작한 검도도 성균관대 재학 시절엔 대학선발팀에 뽑힐 정도가 됐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결혼을 하고 해태제과 광고부에 들어가면서 그의 삶은 급류를 타기 시작했다. 직장 일에 열중했다. 일은 모든 것에 우선 한 1순위였다. 가정은 늘 뒷전이었다.

한창 잘나가던 광고인 실패 뒤 검도의 진리 “조급하면 자멸 하는데 내가 그렇게 살았구나”

자신이 만든 광고가 텔레비전에 나오고, 히트를 치면서 신이 났다.

성취감도 컸다. 그러나 그 성취감 뒤엔 늘 더한 성취를 이뤄야 한다는 부담이 기다리고 있었다.

자극 뒤엔 더한 자극이 필요했다. 승리감과 함께 스트레스가 뒤따랐다. 새로운 아이디어에 대한 부담감은 늘 술자리로 이어졌다.

당시까지만 해도 광고인에게 일반 회사는 물론 신문·방송사와 모델들까지 술 접대를 하던 시절이었다. 한마디로 잘나가던 때였다.

대학 때까지는 구경도 못해본 맥주와 양주, 담배, 그리고 여자…. 술을 마시다 통행금지 시간이 되면 아예 셔터를 내려놓고 밤새술을 마시거나, 포커를 친 것도 다반사였다. 검도로 다져온 몸은 유흥을 즐기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3년 뒤엔 당시 국내 최대 광고대행사였던 제일기획으로 옮겼고, 다시 3년여를 일한 뒤엔 한국타이어로 옮겼다.

해태제과 시절 사장이던 나웅배 전 경제부총리가 한국타이어 사장이 되면서 그를 부른 것.

이곳에서 3년쯤 보내고 다시 동방기획으로 갔다가 88년 장스컴이라는 광고회사를 차렸다.

광고업계에서도 ‘전관예우’란 게 있어서 초창기 사업은 번창했다. 들어오는 돈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였다. 강남의 대형 아파트를 샀고, 새 차가 나올 때마다 차를 바꾸는 것도 모자라 외제차를 굴렸다.

당시엔 구경하기도 어려웠던 모토롤라 카폰까지 달았다. 일과 일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유흥에만 매달리는 생활의 연속이었다. 입

맛도 변덕을 부리기만 해서 고급음식을 시켜놓고도 입맛에 맞지 않으면 안 먹기 일쑤였다. 겉보기엔 남부러울 게 없었지만 아내는 못 살겠다고 했다.

세 딸의 불만도 크기만 했다. 가장 가까운 사람조차 지지하지 않는 가운데 그는 불나방처럼 나만의 성공 신화를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그러다 친구에게 빚보증을 잘못 서 줘 하루아침에 사기꾼으로 몰리는 처지가 됐다. 신화는 악몽이 되고 말았다. 그동안 몸도 마음도 망가져 있었다.

그때 실낱같은 희망의 빛줄기 하나가 검이었다. 손에서 칼을 놓은 지 무려 23년이나 지났다. 하나하나 다시배우지 않으면 안됐다.

그런데도 땀을 흘리고 나면 그렇게 상쾌할 수가 없었다. 그는 검도 도장을
내고, 한국외국어대 용인캠퍼스와 인근 광주종고, 경안중학교에서 검도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예전에 비해 가진 것이 없지만, 주위를 돌아볼 여유가 더 많아졌다. 돈이 없어 수련비조차 낼 수 없는 소년소녀 가장이나 저소득층 자녀들을 적지 않게 데려와 무료로 수련을 시키기 시작했다.



시집가지 않은 그의 두 딸도 그의 제자가 됐다. 광고일을 할 때는 아이디어도 얻고, 휴식도 취하기 위해 온종일 극장에서 영화를 보거나 술을 마셔도 그조차 업무의 연장일 뿐 여유가없었다.

그러나 이제 그에겐 여백의 미가 묻어난다. 한국사회인검도클럽 부회장인 그는 일본인들과 자주 교류한다.

그러면서 일본인들이 오랜 불황 속에서도 가업으로 물려받은 가게나 업종을 바꾸지 않고 내핍으로 역경을 이겨내는모습을 보았다.

장씨는 이제 졸부는 졸망이라고 믿는다.

검도에서도 성급함이 패배의 지름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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